오래 전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에 급격하게 쇠퇴하는 기억력의
탓이리라.
시기가 언제였는지 대상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30대 초반의 동창 친구 쯤이었다고 가정하자.
하소연인지 조언을 구하는 것인지 넋두리를 던져왔다.
"세상 일들이 왜 내 뜻대로 안풀리는 거야?"
딴에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무거운 문제를 마치 무시하듯 간단 명료
하게 답을 했다.
- 죽여 버리고 싶은 놈들 많지? -
- 골통을 깨버리고 아가리를 찢어버리고픈 놈들도... -
- 따먹고 싶은 년들도 많을껄? -
뜻대로 이루어져 모두 죽여 버리고 따먹었다고 치자.
그 댓가로 내게 돌아오는 몫은 평생을 감옥에서 마쳐야 한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세상일은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정답이며
나에게 유익이다.
이 답을 들은 상대로부터 '도사님'이었나 '철학자'였나, 극찬과 함께
'존경스럽다'는 평을 들었던 기억이 가물거린다.
이 까마득한 기억이 불쑥 떠오른건 며칠 전의 '신림동 주거침입 미수사건'의
범인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짤막한 뉴스를 접하고였다.
범인의 행동은 꾸짖고 나무라기에 충분한 일이며 두둔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피해여성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건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불안과
공포에도 공감하며 보호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것과는 별개로, 범인에 대한 법의 처벌은 '법대로'라야 한다.
어느 누구나, 어떤 집단의 이해관계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드러난 사실과 행동, 증거를 바탕으로 이성적으로 냉정하고 준엄해야 한다.
범인이 닫힌 문고리를 흔들고 비밀번호를 시도한 행위는 집안으로 침입하려다
실패한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강간미수는 터무니 없어 보인다.
범인이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이 정말 강간이었는지, 물건을 훔치기 위함인지,
혹시라도 묻지마 살인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구체적인 목적 없이 맹목적 행동
인지는 구별하기 어려운 일이다.
설령 어느 한가지였다고 치더라도, 마음 속에 품은 생각까지도 법으로 판단하고
처벌하겠다는 것인가?
강간미수로 청구된 구속영장이 여과없이 그대로 발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건에서 느꼈던 불안과 공포보다 훨씬 큰 두려움이 엄습했다.
범인은 단독범행인데 비하여, 구속영장은 수사한 경찰과 영장을 청구한 검찰과
발부한 법원이 공동으로 이룬 합작품이기도 하거니와, 다음 차례는 저 위에서
내가 고자질한 지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죽여버리고, 골통을 깨버리고, 아가리를 찢어버리고, 따먹고픈 대상이 무수히
많았던 상습흉악범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차례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지켜보며 세상이, 사람들이 야금야금 미쳐가며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세상과 사람들은 멀쩡한데 나 혼자만 미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민주사회의 근간이어야할 '법치'가 흔들리고 망가지고 있다는
한가지 사례와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고 무죄로 판단하는 대신에, 주거침입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려 실형을 선고했다는 소식이다.
상상범죄와 국가공권력 집단폭행의 위험을 '법치'로 지켜
낸 훌륭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공권력의 집행과 법치는
"어느 누구나, 어떤 집단의 이해관계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드러난 사실과 행동, 증거를 바탕으로 이성적으로
냉정하고 준엄해야 한다."
[상상범죄를 물리친 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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